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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연 개인전 《카르마》 서문

보아라, 들어라, 태워라                           홍예지 미술비평가


보는 눈이 있다. 사방팔방에. 그 눈은 너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본다. 너의 결정에 의해 하나의 차원이 열리고 다른 수많은 차원이 닫힌다. 너의 삶은 생중계된다. 온 우주가 관람객이다. 한 순간 뒤에 오는 다음 순간, 그 다음 순간, 또 그 다음 순간. 계절의 순환에 따라 저절로 피고 지는 꽃처럼 한 생애가 피고 진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너는 모른다. 너는 이 세계에 뚝 떨어진 초심자가 아니다. 너와 이 세계는 구면이다. 너희는 여러 번 만났다. 만날 때마다 예외 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줬다. 여러 생에 걸쳐서. 너는 쉽게 잊는다. 네가 무엇을 했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너는 보지 못한다. 너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원인과 결과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을. 오직 일어남이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을 하기로 한 결정’과 ‘그것을 실행하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는 “동일한 과정의 나눌 수 없는 측면들”이다.[1] 이것이 카르마의 본래 의미다. 예지력은 그 관계성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이다. 즉 행위를 제대로 보는 눈이다. 이 한 점에서 무엇이 시작되는지, 무엇이 밀려오는지 꿰뚫어보는 지혜다. 그러니 눈을 씻어라. 유심히 보아라. 너의 내면에 이는 파문(波紋)을. 영혼에 깊이 새겨진 물결(波)-무늬(紋)를. 이 무늬는 패턴이다. 습관처럼 굳어진 무엇이며, 과거의 내가 깔아 둔 자동 실행 프로그램이다. 주의를 기울여라. 알아차리지 않으면 영원히 반복하게 된다. 반복이 고통을 낳는다. 박서연의 그림에 나타난 수많은 눈이 목격한 진실이다. 스텐실처럼 반복해서 찍어 낸 고통의 문양들을 보아라. 다른 이가 아닌 너의 손자국이다. 윤회의 바퀴자국이다.
저 깊은 바다에서 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고래의 영혼은 살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래는 인간과 단단히 얽혀 있다. 이 얽힘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다시는 바닷물이 핏빛으로 물들지 않도록. <기(氣)를 승화시키는 법> 연작은 고래의 한을 달래는 주술적 그림이자 신성한 의식이다. 고래의 몸에 꽂힌 작살을 빼내어 상처를 치료하고, 향을 높게 피워 올린다. 연기 사이로 무수한 고래의 영혼이 겹쳐 보인다. 하나의 죽음이 또 다른 죽음과 포개어진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이여, 막힌 귀를 뚫어라. 들어라. 한 고래를 그리워하는 다른 고래의 애달픈 울음을. 슬픔은 거리를 초월한다.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지르고 수백 년을 관통한다. 바다에 진동하는 업의 노래를 들어라.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듣고 있는가? 박서연의 그림은 진중한 물음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내면의 소리를 무시한 채 살아가는 너를 깨우는 알람이다. 어제와 똑같은 행위를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지 말라. 태워라, 그 구속의 끈을. 과거로부터 상속받은 행위를. 자유의 자식이자 어버이인 너, 지금 새로워질 수 있다. 매 순간 달리 시작할 수 있다. 기나긴 연쇄의 끝에서 변화의 바람이 분다. 손끝을 맴도는 시원한 공기를 느껴라.



[1] 앤드류 올렌즈키, 『붓다 마인드: 욕망과 분노의 불교심리학』, 박재용·강병화 옮김, 올리브그린, 2018, p.201.